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검의 밤 (문단 편집) == 전개 ==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는 것을 매우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돌격대를 기반으로 당 내 2인자로 급부상한 룀을 견제하기 원했던 괴링, 힘러, 괴벨스 등은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게슈타포]]를 힘러 휘하로 전속시켜 SA의 반역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게 했고 힘러의 SS와 그 휘하의 보안국(SD) 국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로부터 2000만 마르크를 받아 6월 24일에 SA를 동원하여 히틀러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어내 히틀러에게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든 히틀러는 결국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등은 그동안 계속 '''[[살생부]]'''를 작성하였고 SS에 동원 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룀과 동료들은 바트비제로 휴가를 떠나 있었다.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서 회의를 위해 필요하니 6월 30일까지 모든 SA 지휘관을 뮌헨의 바트비제 온천에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룀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명의 30일이 밝자 히틀러는 직접 바트비제에 도착하여 힘러 휘하의 SS를 동원해 룀과 SA 지휘관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요제프 디트리히]]는 친위대 2개 중대를 이끌고 [[뮌헨]]에 도착했고 뒤이어 히틀러도 합류했다. 직후 히틀러는 마중나온 뮌헨 돌격대 지휘관 2명을 보고 계급장을 떼 버리더니 "이놈들부터 일단 총살시켜!"라고 소리쳤고 그 2명은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끌려간 후 다음 날 총살당했다. 이유는 6월 29일 뮌헨에서 수천 명의 돌격대가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돌격대를 버렸다며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그 뒤 히틀러는 직접 친위대 및 경찰 병력을 대동하고 바트비제 온천의 인근 돌격대가 투숙하고 있던 호텔을 급습해 아직도 자고 있었던 룀을 비롯한 돌격대 지도부를 전원 체포했고 이들을 뮌헨의 교도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정오 히틀러는 뮌헨의 나치 당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고 폭로했고 룀과 그 동조자들을 처단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선포로 인해 돌격대 지휘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리고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는 선포와 함께 베를린에서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들이 숙청 작업을 개시하여 돌격대뿐만 아니라 독일 내의 반나치 세력들도 숙청했다. 괴링이 주도한 이 숙청은 베를린만이 아니라 뮌헨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부터 시작되었다. 돌격대뿐만 아니라 히틀러에게 도전하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보수파 인사들, 그리고 히틀러의 정적들이 모두 숙청 대상이었으며 이 정적들에게는 룀의 쿠데타 기도에 가세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룀에 대해서는 히틀러가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처형이 아니라 자결할 기회를 주라고 지시했으며 룀이 자살을 거부할 때만 처형하라고 했다. 하지만 룀은 자결하라는 의미로 감방에 권총이 들어왔음에도 자결을 거부하다가 친위대 장교이자 미래에 다하우 강제수용소 소장이 되는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사살당했다. SA 숙청의 표면적인 이유로는 반란음모 혐의가 씌워졌고 이는 숙청 며칠 후 일반에 공개되었다. 6월 30일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으로 나치당 내의 좌익 계열은 일소되었으며 이를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